산산조각 / 정호승
룸비니에서 사온
흙으로 만든 부처님이
마룻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
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
목은 목대로 발가락은 발가락대로
산산조각이 나
얼른 허리를 굽히고
서랍 속에 넣어두었던
순간접착제를 꺼내 붙였다
그 때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
불쌍한 내 머리를
다정히 쓰다듬어 주시면서
부처님이 말씀하셨다
산산조각이 나면
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
산산조각이 나면
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가 있지
* 룸비니 : 네팔 남동부에 위치한 동산. 부처(싯다르타)가 태어난 곳.
— 『 이 짧은 시간 동안 』, 정호, 창비, 2004
이 시는 부처님이 산산조각 난 모습을 통해 우리 삶의 깨짐과 회복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.
무언가 소중한 것이 부서졌을 때, 우리는 순간적으로 당황하고 서둘러 붙이려 하지만, 그 산산조각 난 상태 자체가 새로운 삶의 모습이 될 수 있음을 부처님은 조용히 알려줍니다.
우리는 온전하지 않아도, 부서진 채로도, 산산조각으로도 살아갈 수 있습니다.
상처와 트라우마, 결핍을 안고 살아가지만, 그것이 우리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아요.
우리는 역시 완벽한 상태만을 바라며 깨지지 않으려 애써왔지만, 때로는 꿈도 희망도 나 자신도 산산조각 날 때가 있지요.
그럴 때, 부서진 조각들을 억지로 숨기거나 외면하지 말고, 그 파편들을 다시 바라보려 합니다.
그 파편을 품은 채로,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음을 믿고 싶어요.
‘산산조각이 나면,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 있다’는 부처님의 말씀이 내게는 상처와 실패를 수용하고, 그 안에서 다시 일어나는 용기를 주는 것 같았습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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